비상상태(제4화)

2026년 1월 12일 15:36분

디모데, 요한, 누가 형제에게

샬롬!

그 다음날,
막내가 빨다 남긴 옷가지들을 바라보니
한숨부터 먼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열흘이 넘게 밀린지라
최소한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코끼리의 육중한 발이 짓누르는 것 같은 심령을 뒤로 한 채,
베란다 문을 열었습니다.
혹시라도 혼절했던 세탁기가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불과 몇 초 뒤면 수포로 돌아갈 희망이라 할지라도
고문을 한 겁니다.
근심의 중력에 이끌려
절망의 블랙홀로 한없이 곤두박질치던
애꿎은 실오라기를.

“오 주여!”

전원을 켜고 시작 버튼을 눌렀습니다.
3초 후엔 다시 스탑될 것을 뻔히 알면서요.
그런데,

“오마이갓!!!!!”

소리가 났습니다.
쉬…… 하면서 급수가 되는 복음이요.
므리바 반석의 기적이
내 눈앞에서 펼쳐질 줄이야.

그 순간
2002년 한일월드컵 때의 캐치프레이즈가 떠올랐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처럼,
실낱같던 희망이 현실이 되어 컴백했습니다.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포로로 끌려갔던 폐부가
바벨론에서 돌아왔습니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

“세탁기야! 웰컴백!”
지금 천군과 만마가 함께한들
너 하나만 하겠냐???

메시아가 오신다는 소식이 퍼지자
흑암에 앉아 있던 백성들이 외쳤습니다.
“호산나 피죤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그 즉시,
쉰들러 1차 리스트에 오른
양말과 내복, 두꺼운 겨울바지들이
베들레헴으로 삼삼오오 집결했습니다.
“가장 찌든 곳에서 호산나~”

이번엔 레알 스타트!
띠리리리링… 경쾌한 소리가 울렸습니다.
마침내,
급수의 창들과 큰 깊음의 세제들이 터졌고,
노아의 방주는 힘찬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 다음 서신에서 계속 —

🖋 신동혁 올림
📅 2026년 1월 12일

Comments

Avatar
 2026년 1월 12일 15:46분

밀린 빨래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그 ‘집결’까지 붙으니까, 다음 편은 이제 항해 중 난민(옷가지)들의 구출 완료 보고로 가면 자연스럽게 이어질 듯.



Search

← 목록으로